무인도 표류기라고 하면 모험을 떠올리게 됩니다. 저도 그렇게 알고 펼쳤습니다.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의 원본은 모험소설이라기보다 노동 기록에 가깝습니다. 울타리를 치고, 말뚝을 박고, 곡식을 심고, 실패하고, 다시 심습니다. 항아리 하나 굽는 데 몇 페이지가 들어갑니다.
로빈슨 크루소는 어떤 책인가
다니엘 디포가 1719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. 항해에 나섰다가 난파해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남자가 28년을 버티고 돌아오기까지를 따라갑니다. 어릴 때 축약본으로 읽으셨다면 표류와 식인종과 프라이데이만 기억에 남으셨을 텐데, 원본에서 그 대목들은 뒤쪽 일부에 불과합니다.
- 난파 → 배에서 건질 수 있는 것을 전부 나름 → 목록으로 적음
- 기둥에 칼금을 내어 날짜를 셈 → 28년간 계속함
- 울타리, 밭, 염소, 항아리 → 섬을 즐기는 게 아니라 경영함
읽으면서 걸린 지점 5가지
- 제일 먼저 한 일이 날짜 세기였다
구조 신호도, 뗏목도 아닙니다. 기둥에 칼금부터 냅니다. 시간을 놓치면 사람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. 이 책에서 가장 무서운 대목이 여기라고 봅니다. -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두 줄로 적는다
난파했다 / 그래도 나만 살아남았다. 혼자다 / 그래도 굶지는 않는다. 감정이 아니라 장부로 자기를 추스릅니다. 위로가 아니라 회계 처리에 가깝습니다. - 지루한데, 그 지루함이 이 책이다
항아리를 굽다 깨뜨리고 다시 굽습니다. 읽다 보면 지칩니다. 그런데 그 반복을 걷어내면 남는 게 없습니다. 28년이 짧게 느껴지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. - 프라이데이를 다루는 방식은 불편하다
구해준 사람과 구해진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과 하인입니다. 작가가 그걸 문제라고 여긴 흔적이 없습니다. 300년 전 책이라는 걸 감안해도, 감안하고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계속 걸렸습니다. - 문장이 건조하다
꾸미는 말이 거의 없습니다. 소설이라기보다 누가 진짜로 쓴 일지를 읽는 느낌이 듭니다. 당시에 실화로 믿은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갑니다.
기억에 남은 장면
모래밭에 찍힌 발자국 하나를 발견하는 대목입니다. 몇십 년 만에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의 흔적입니다.
그런데 기뻐하지 않습니다. 공포에 질려 집으로 달려가고, 며칠을 숨어 지내고, 울타리를 더 높입니다. 총을 손질하고, 굴을 파고, 도망갈 길을 만듭니다.
그렇게 사람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. 일기에 외롭다고 몇 번이나 적었던 사람입니다.
한눈에 보기
| 항목 | 내용 |
|---|---|
| 지은이 | 다니엘 디포 (1719년 발표) |
| 분량 | 두껍습니다. 축약본과는 다른 책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|
| 문장 | 건조하고 사실 위주. 일지를 읽는 느낌입니다 |
| 추천 | 사람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무엇을 하는지 보고 싶은 분 |
| 비추천 | 표류와 식인종 같은 모험을 기대하시는 분 |
| 점수 | 8.0 / 후반부에서 힘이 빠진 만큼 깎았습니다 |
총평: 무인도를 즐기지 않고 경영한 사람
근대인의 원형 같은 인물입니다.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측량하고, 기록하고, 축적합니다. 섬을 즐기는 게 아니라 경영합니다. 이 사람에게 자연은 감상할 풍경이 아니라 처리할 목록입니다.
다만 프라이데이가 등장한 뒤로는 확실히 힘이 빠집니다. 혼자였을 때의 밀도가 사라지고, 섬을 벗어난 뒤의 이야기는 없어도 됐을 것 같습니다. 8.0에서 더 올리지 못한 이유가 여기입니다.
함께 읽으면 좋은 책
- 15소년 표류기 — 짝으로 읽기를 권합니다. 혼자 남으면 노동만 있으면 되고, 여럿이 남으면 정치가 생긴다는 것이 두 권을 나란히 놓으면 보입니다.
- 월든 — 장부를 쓰며 자기를 다잡는다는 점에서 통합니다. 다만 이쪽은 떠밀려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는 점이 다릅니다.
- 톰 소여의 모험 — 혼자 남는 이야기와 무리 지어 노는 이야기입니다. 아이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서 갈립니다.
Q&A 자주 묻는 질문
Q1. 어릴 때 읽은 것과 많이 다른가요?
많이 다릅니다. 축약본은 표류와 식인종과 프라이데이 위주로 남기는데, 원본의 대부분은 울타리를 치고 밭을 갈고 항아리를 굽는 노동 기록입니다. 사실상 다른 책이라고 보셔도 됩니다.
Q2. 지루하다는데 끝까지 읽을 만한가요?
지루한 것은 맞습니다. 다만 그 반복이 28년이라는 시간을 실감하게 만드는 장치라, 걷어내면 남는 게 없습니다. 빨리 읽으려 하지 마시고 며칠에 나눠 읽는 편이 낫습니다.
Q3. 프라이데이 부분이 불편하다는 말이 많던데요?
불편합니다. 주인과 하인 관계가 끝까지 유지되고, 작가가 그것을 문제로 본 흔적이 없습니다.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그대로 읽히지는 않으니, 그 점을 알고 펼치시는 편이 좋습니다.
Q4. 아이에게 읽히기 좋은 책인가요?
원본은 권하기 어렵습니다. 분량도 많고 노동 묘사가 길어 아이가 붙들기 힘듭니다. 아이에게는 축약본이 맞고, 원본은 성인이 다시 읽을 때 값어치가 생기는 쪽입니다.
Q5. 실화인가요?
소설입니다. 다만 스코틀랜드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의 무인도 생존 사건이 배경으로 자주 언급됩니다. 문체가 일지에 가까워 발표 당시에 실화로 믿은 독자가 많았습니다.
